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레우코스 제국 (문단 편집) == 정치 == 국왕은 스스로 페르시아의 왕중왕(샤한샤) · 그리스의 대왕(메가스) · 신왕을 칭하여 자신이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의 군주이며 신성한 존재임을 선언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국왕은 자유와 민권의 수호자를 자처했지만,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에게 이 칭호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제국의 군주들은 자문 위원회를 구성하고 측근과 관료, 장군들과 함께 국가를 통치했다. 그리고 법적 분쟁 해결과 왕령지 관리, 화폐 발행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고 지역 공동체와 도시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민심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 지역의 세금을 면제해주거나 감세하는 조치를 취했다. 토착신과 그리스 신들에 대해 경배하고 제례에 필요한 제물을 제공했으며 그리스 종교와 토착 종교를 따지지 않고 각지의 신전과 종교 단체를 후원했다.[* 군주들은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신들에게 제물을 헌납해 토착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는 스스로 페르시아의 전통을 따른 왕임을 내세우고 지구라트를 유지·관리했으며 신년 축제인 아키투 의례에 참여했다.] 군주들은 제국에 헬레니즘 문화와 철학, 종교를 전파했으며 페르시아어를 익히고 토착 문화를 관대하게 수용해서 동 · 서양의 문화적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이들은 이러한 의무를 등한시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바르바로이에 대한 거부감만큼이나 오리엔트식 전제 왕권에 대한 거부감도 강했던 반면,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세습적인 전제 왕권이라는 개념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세에는 마케도니아의 귀족들이 왕을 자신들의 대표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이들에게 전제 왕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식 예법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 그의 장군들이 반발한 것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절을 하는 행위를 오로지 신에게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식으로 인간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하는 행위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었다.]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장군이 군사들에게 "왕을 치러 간다"는 사실을 숨겼다가, 군사들이 사실을 알게 되자 단체로 항명해버려서 반란이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왕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을 신, 구원자, 혹은 특정 신의 현신이라고 주장했는데,[* 시조 셀레우코스 1세는 자신이 [[아폴론]]의 후예라고 주장했고, 그 증거로 닻의 형상(보통 셀레우코스 왕조가 등장하는 게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문장으로 등장)을 한 모반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했다.] 이러한 군주 숭배 사상은 안티오코스 2세 때 기반이 닦이고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 때 확립된다.[* 경쟁 세력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치세때 왕조의 창건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신적 존재로 만드는 군주 숭배 사상을 정책적으로 퍼뜨리고 고대 이집트 역대 왕조의 파라오들처럼 근친 결혼을 해서 이집트인들의 민심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 강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들 중에는 암살당하거나 군사 반란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이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제국은 왕위 승계가 벌어질 때마다 왕위를 놓고 내전이 벌어져 국력이 약화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의 치세까지는 그런데로 내전의 상처를 잘 이겨내고 패권을 유지했지만, 안티오코스 4세가 급사한 뒤부터 벌어진 내전과 이 틈을 노린 외세의 침공에는 견디지 못하고 쇠퇴하고 만다. 그리스 본토는 정치 상황이 혼란스럽고 임금이 크게 하락하는 등, 일반 민중들에게는 영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고향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아시아로 인생역전을 노리며 몰려들었다. 가진 것 없는 그들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제국 전체의 통치권과 군대를 가진 군주의 호의를 입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왕의 눈에 든 이는 왕의 "친구", 즉 "필로이"가 되었으며, 이런 '친구'들은 왕의 개인적인 측근인 동시에 왕국의 지배 계층이었다.[* 이들은 '친구' - '영예로운 친구' - '최고의 친구' - '최고의 영예로운 친구'라는 4단계의 계급으로 분류하며,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왕관까지 허락했다. 그리스어로는 '필로스'라고 부르며 복수형은 '필로'이다.] 왕의 친구들은 필요에 따라 중앙 정부와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업무를 수행하고 군주에게 여러 가지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필로이' 중에서 일부는 출신 도시와 유력 가문들과의 연줄을 가지고 있어서 군주는 이들을 통해 지방 도시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왕의 친구들'은 군주에게 매우 유용한 존재였지만, 왕위 계승시에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선왕의 필로이들과 측근들을 총독과 주요 관직에 임명해 통치권을 확립하려는 현왕, 이런 현왕의 정책을 부추기고 출세하려는 필로이들간의 이해가 충돌해서 음모와 반란이 일어나고[*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의 치세 초반에 중앙에서 국정을 농단하다가 안티오코스 3세의 역공에 숙청당한 헤르미아스, 이런 헤르미아스와 갈등을 빚고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한 지방 총독들인 소아시아의 아카이오스 2세, 페르시아와 바빌로니아의 알렉산드로스&몰론 형제의 반란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기들끼리 지연 · 혈연으로 나뉘어 파벌 다툼을 벌이거나, 충언을 빙자해서 자신과 자기 지역에 이익이 되는 일을 제안하거나, 그리스인 왕비와 페르시아인 후궁의 자식들을 놓고 후계자 분쟁을 벌이는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왕비와 후궁 가문간의 다툼도 벌어졌기 때문에, 왕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을 공동왕에 임명해서 계승 분쟁을 막으려고 했다.]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이 쓴 《로마사》 4권에 의하면, 셀레우코스 왕국은 한 마디로 말해 중세 유럽의 [[신성 로마 제국]]과 비슷했다고 한다. 즉, 겉으로 보면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인 듯하지만, 사실 내부 사정을 놓고 보면, 수많은 도시 국가나 영방 국가들로 분열되어 그 응집력과 단결력이 허약한 나라라는 것이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겉으로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인도까지 지배하는 '왕중왕'이라고 과시했지만, 사실 그 내구력은 형편없었다는 것이 몸젠의 해석이다. 그렇기에 단단한 응집력으로 무장한 로마가 부각되자, 셀레우코스 왕국은 그 흐름을 막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실제로 거대한 영토를 지닌 셀레우코스 왕조가 [[마그네시아 전투]] 한 번의 패전으로 계속 쇠퇴일로를 걷다가 힘없이 무너진 것에 반해, 로마는 [[칸나이 전투]]나 [[아라우시오 전투]] 등 수많은 패전을 겪었어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패전을 곧바로 만회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보다 훨씬 오랫동안 강건히 존속한 사실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견해다. 그러나 상술된 견해는 100년 전의 몸젠이 피력한 것으로서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많이 이뤄진 현재에 와서는 설득력을 상당히 많이 잃어버린 학설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에도 중동에서 계속 패권을 유지했으며 파르티아나 박트리아, 아르메니아 등의 국가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내전에 돌입하기 전까지는 제국의 패권에 도전하지 못했다. 안티오코스 3세 사후에 즉위한 셀레우코스 4세와 안티오코스 4세의 노력으로 제국은 다시 중흥을 맞이했으며 안티오코스 4세의 정책과 여러 분야에 걸친 개혁은 마카베오 반란이 일어난 팔레스티나 지방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제국이 정말 쇠퇴하게 된 것은 안티오코스 4세가 전염병으로 급사하면서 일어난 내전이 끝도 없이 일어나 국력을 박살낸 것 때문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안티오코스 7세의 파르티아 격퇴와 중흥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제국은 마지막 희망을 잃고 몰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